책 리뷰

채사장 - 열한계단 #2 신약성서

송윤선 2021. 5. 25. 22:45

 

지난 시간에 문학을 이야기했다.

죄와 벌을 통해서 고등학생 채사장에게 문학이 미친 영향을 살펴봤었다.

죄와 벌의 줄거리와 더불어 인생의 의미를 깨우치게 해주는 대목도 살펴봤다.

 

 

[책 리뷰] 채사장 - 열한계단 #1 문학 (feat. 죄와벌)

[책 리뷰] 채사장 - 열한계단 #1 문학  이렇게 챕터를 나눠서 따로 리뷰를 하는 이유는 각 챕터별로 채사장이 말하는 책도 같이 리뷰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채사장의 열한계단 첫 번째 챕터는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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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문학에서 찾을 수 없는 인생의 목적이나 의미를 찾고 싶었다고 한다.

그때 문득 로쟈가 마지막에 신약성서를 읽으며 깨달음을 얻는 모습이 떠올랐단다.

그렇게 저자는 신약성서를 읽기 시작한다.

 

 

나는 모태신앙으로 성당을 태어나서부터 다녔었다.

고등학교때는 매주 저녁 먹은 후 기도를 할 정도였다.

미션스쿨이었기 때문에 학교안에 작은 기도할 수 있는 공간이 있어서 좋았다.

매일 묵주기도하면서 생각을 정리하고 명상하는 시간을 가졌었다.

 

 

사실 나는 믿음을 갖고 성당을 다녔다기보다는 나를 정리하는 시간으로 성당을 활용했다고 생각한다.

명상을 하고 기도를 통해서 생각을 정리하는 시간이 좋았던 것이지, 구원이나 천국을 진실로 믿진 못했다.

 

 

 

 

이 책에선 신자로써 가질 수 있는 질문들 의심들을 직접 하느님과 하는 형태의 모습을 보여준다.

대화하는 모습을 통해서 저자가 전달하려는 성서의 깨달음을 전해주는데, 그 내용들이 아주 볼만하다.

 

 

1. 지금 인구의 1/3은 하느님을 믿고 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세상엔 가난과 고통과 불의가 많이 존재하는가.

 성경에 씨뿌리는 사람 이야기가 나온다. 씨를 뿌렸는데, 씨가 어디에 떨어지느냐에 따라 싹을 틔우는지 여부가 결정된다는 이야기다. 돌밭, 비옥한 토지, 가시덤불 등 다양한 땅들을 소개하면서 같은 씨라도 어디에 떨어지느냐에 따라 결과가 다름을 보여주는 내용이다. 이 이야기를 신앙에 비유하면 말씀을 씨앗이고 땅을 사람으로 비유할 수 있다. 말씀을 들을 준비를 하고 비옥한 토지를 유지하는 준비된 사람에게 말씀이 전달되고 싹을 틔울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저 성당에 다니고 교회에 다닌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라 실제로 삶을 통해 깨달음을 실천해야 한다고 말한다. 말씀을 듣는 것을 행하지 않고 위선자의 모습들을 보여주면 벌을 받게 되리라고 말한다.

 

2. 실제 현실을 보면 벌을 받을 사람은 더 떵떵거리고 더 잘먹고 잘 산다. 한편 진실되게 선하게 사는 사람들 중에서도 찢어지게 가난해서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도 많다. 전지전능한 신이신데 왜 이런 악들을 방치하시는 것일까.

 성경은 늘 비유를 통해서 말한다. 이번엔 밀밭의 잡초를 예로 들어서 설명한다. 밀밭에서 밀도 자라고 잡초도 자란다. 종들이 주인에게 잡초들을 모두 뽑을지 물어보자 주인은 그러다 밀까지 뽑히면 어떡하냐고 말한다. 그러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고 잡초는 뽑아 불에 태워버리고 밀은 곳간에 거두어들인다고 말한다. 즉 아직 심판의 때가 오지 않았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더 질문한다. 그러면 어떤 선한 행동이 우리를 '밀'이 되게 만들어주는가. 채사장이 보여주는 그리스도는 십계명을 지키며 자신의 재산을 나누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라고 말한다. 부자는 구원받을 수 없다고 덧붙인다. 이것이 밀이 되는 길이다.

 

3. 믿으면 구원된다는 사실을 알겠다. 그런데 믿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가. 지위를 믿는 것인가 아니면 말씀하신 이타적인 삶을 믿는 것인가. 성당에 다니며 신의 아들이라는 지위를 믿지만 이타적으로 살지 않는 사람과 성당에 다니진 않지만 진실되게 타인을 위한 삶을 사는 사람, 둘 중 누가 믿음을 갖고 있는 사람인가.

 초기 신학은 배척당했다. 평등을 내걸었기 때문에 당시의 지도세력에 의해 탄압당했다. 그래서 신앙 자체를 믿는다는 것의 의미가 컸다. 그러나 지금은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누구도 뭐라 하지 않는다. 이 시점에 믿음의 의미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이 책에 제대로 나와있지 않다. 다만 유명한 베드로의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잡혀가는 날 새벽에 닭이 울기 전에 3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말한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그러리라는 것을 이미 알고 베드로에게 이야기까지 하지만 베드로는 결국 예수님의 예언대로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말하게 된다. 본인의 생존을 위해서다.

 

 베드로의 모습을 통해 믿음의 의미에 대해서 전달하고자 한다고 받아들였다.

 


느낀점


 

나는 이렇게 논리적 반박을 시도하지 않았다.

그저 불신했고 의심했다.

그런 의미에서 채사장이 조금 더 끌렸던 것 같다.

본인이 신약 성서를 왜 읽게 됐는지 끝까지 초심을 지키는 모습과 진리를 추구하기 위해 끊임없이 질문하는 모습이 멋있었다.

그리고 성경을 한 번 쭉 읽어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질문을 하고 그에 대한 대답을 들을수록 마음속에 반감이 더 커져갔다. 더 질문을 하고 싶었다. 더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 어쩌면 빈틈이 없기를 기대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치명적인 질문과 반론이 제기되어도 예수 그리스도가 이 모든 질문을 모순 없이 해결해줄 수 있기를 바란 것인지 모른다. 이때의 나는 반박할 수 없는 진리가 당연히 가장 위대한 진리일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언제나 참일 수밖에 없는 진리를 원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반박할 수 없고 언제나 참인 진리가 가장 무의미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이 챕터에서 내가 제일 마음에 들어하는 부분을 그대로 인용했다.

몇 문장을 뽑기에는 모든 문장들이 필요해 보여서 조금 길지만 모두를 인용했음을 양해해줬으면 좋겠다. 

 

 

 이 부분이 내가 가장 감탄했던 부분이다.

 

'반박할 수 없고 언제나 참인 진리가 가장 무의미할 수도 있다는 것'

 

머리를 때리는 깨달음을 받은 기분이 들었다. 

 

 

채사장과 함께하는 열한 계단을 더욱 기대되게 만드는 대목이었다.

세상의 다양한 저마다의 진리를 느껴보고 싶었다.

반박할 수 없고 언제나 참인 진리가 아닌 나름의 진리.

불교의 진리가 됐건 철학의 진리가 됐건 과학의 진리가 됐건 궁금해졌다.

그래서 채사장과 계속 계단을 올라가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앞으로 이 책의 리뷰를 통해서 한 단계씩 올라갈 예정이다.

챕터별로 나오는 책들과 사상들을 정리해가면서 느리지만 꾸준하게 나아가려 한다.